고도경주의 가치 - 노블레스 오블리지  
이름 : 사무국 날짜 : 2006-06-20 15:01:00 조회 : 2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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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경주의 가치 - 노블레스 오블리지

宋 復(연세대 명예교수 / 경주고도보존회 고문)

1. 2개의 국가이성
신라가 어떻게 3國을 統一했을까. 당시 3國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하고, 가장 변방에 처해 있던 나라가 신라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국토도 좁고 인구도 적고, 거기에 대륙의 발달한 文物의 유입도 가장 늦은 나라가 신라다. 어느 모로 보나 3國 중에서 가장 후진국일 수밖에 없는 나라가 신라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나라가 3國을 통일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대답은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다. 異民族인 唐을 끌고 와서 같은 민족인 다른 두 나라를 쳤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역사를 잘 모르는 문외한에게도 큰 의문을 남긴다.
그것은 무엇보다 국가는 고대국가든 현대국가든 2개의 ‘국가 이성‘을 가진다라는 점에서다. 그 하나는 국가안보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이익이다. 어떤 국가든 국체를 안전하게 보전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기능의 第一義가 된다. 국체가 안전하지 못하면 결국 그 국가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고, 급기야는 망하고 만다. 그런 면에서 국가이익 또한 그 어떤 개인의 이익, 그 어떤 집단이나 정파의 이익, 혹은 그 어떤 다른 나라의 이익보다 우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나라든 국가안보와 마찬가지로 국가이익을 第一義로 생각해서 언제나 지키고 높인다. 이러한 2개의 국가이성은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도 공통적으로 다 가진다. 그것은 국가라는 형태를 띈 국가면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는 당시 최대의 강국인 唐과 손잡을 수 없었는가. 백제는 또 왜 親唐외교를 할 수 없었는가. 외교란 후진국보다 선진국이 훨씬 더 잘하게 돼 있고, 더욱이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는 달리 唐과 바로 접하고 있지 않았는가. 고구려가 隋 그리고 唐과 수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해도 국가간 관계란 무상한 것이어서 언재나 敵으로 머물러 있는 나라도 없고, 언제나 友邦으로 남아 있는 나라도 없다. 어제의 적과도 동맹을 맺고, 오늘의 우방과도 손을 끊는 것이 국가간 관계다.
거기에 唐은 오늘날 미국과도 같이 당시 최고 최대의 슈퍼강국이지 않았는가. 인구만해도 唐이 5천만명을 상회하는데. 고구려며 백제는 당시 기록으로 보면 겨우 각기 150만 명을 전후한다.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고구려처럼 한두 번 이길 수 있는 것이지 계속해서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처럼 異民族과의 끊임없는 쟁투 속에서 국체를 보존해 가야하는 나라에선, 당시 최강국인 唐과의 친선관계 유지는 삼척동자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상식이다. 백제 역시 倭와 가까이 지냈다해도 倭보다는 唐이 더 필요시 되고 중요시 되는 나라라는 것쯤은 어린 아이도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2차대전후, 소련 쪽에 줄서는 것보다 미국 쪽에 줄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보다 더 쉽게 깨칠 수 있는 것이 당시 상황이며 주변 정세다. 사실 8,15 직후의 상황은 얼마나 복잡했는가. 어느 쪽이 더 유리하고 더 우세할 것인지, 당시 몇 사람이나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누구나 잘 알 수 있었던 당시의 국제정세에 고구려와 백제는 왜 그토록 어두웠고, 반면 신라는 어떻게 그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는가.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의문은 ‘신라가 異民族을 끌고 와서 같은 동족을 쳤다‘는 진술(statement)이다. 문제는 ‘동족‘이라는 진술이 성립될 수 있는 진술인가 하는 것이다. 그 진술이 성립되려면, 당시 사람들이 민족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내부에 민족의식이 형성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각기 다른 두 나라에 대해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 정체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이 3국 중 어느 나라도 그런 민족의식, 그 같은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 나라가 700년 동안이나 갈라져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지 않았는가.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제압하고 서로가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 어느 異民族 간에도 볼 수 없을 만큼 치열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10년 20년, 1백년 2백년이 아니라 몇세기 동안 계속됐다면, 거기에 어떻게 민족의식이 싹트고, 저편이 나와 같은 동족이라는 민족정체성이 만들어 질 수 있었겠는가.
해방 후 불과 ‘5년 사이‘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 ‘5년 사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1천년 동안 같은 민족집단으로 같은 운명공동체로 함께 살아왔음에도 그 불과 5년 갈라져 있는 사이 서로가 다른 군대를 끌고 와서 서로가 서로를 3백만명이 살상하지 않았는가. 그 ‘불과 5년‘ 사이에도 깡그리 무너져버리는 것이 민족의식이고 민족 정체성이라면, 그런 것이 전혀 생겨날 수도 없고 설혹 생겨났다 해도 현실적으로 전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그 민족의식을 가지고 당시 3국 관계를 설명한다면, 그 史家들의 역사 설명이야말로 또한 얼마나 무의미․무가치한 역사 설명인가.

2. 살아있는 지도층
- 신라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지
그러나 논의의 촛점은 거기에 있지않다. 어떻게 신라가 3국 통일을 할 수 있었느냐에 있다. 그것은 오직 신라의 ‘指導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지도층이 고구려 백제의 지도층보다 ‘훨씬 살아 있는‘ 지도층이었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다. 일반국민에 비해 훨씬 높은 지식과 판단력을 가진 지도층, 정확한 정세 분석과 상황 통찰력을 가진 지도층, 강한 희생정신과 도덕성을 가진 지도층, 국민적 단합과 높은 국민적 지지도를 가진 지도층, 그 지도층이 당시 신라의 지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의 지도층은 법흥왕초기(AD 514)로부터 문무왕 말기(AD 681)까지 무려 167년간이나 계속된다. 金富軾의 三國史記를 보면, 券41에서 50까지의 列傳편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85명이다. 이 중 고구려인이 12명이고 백제인이 3명, 후백제인이 견훤의 부자 사위등 6명이고, 후고구려인은 궁예 단 한명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63명이 신라인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라인들의 절대다수는 그야말로 도덕성과 희생정신으로 무장된 신라 지도층의 대변자들이다. 오늘날 지도층하면 으례 거론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의 상징적 인물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지는 높은 지위에 따른 도덕적 행동이며 희생적 행동이다. 지위가 높으면 높은 것만큼 혜택도 많이 받고 존경도 많이 받는다. 혜택과 존경을 많이 받는 것만큼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남을 위해 앞서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지에 충만한 지도층이 신라는 金庾信을 비롯해 반굴盤屈 김영윤金令胤 관창官昌 김흠운金歆運등 헤일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金庾信편을 보면 당태종이 백제를 망치고 돌아온 소정방 蘇定方에게 내친김에 왜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느냐 何不因而伐新羅고 하자, 소정방이 ‘신라는 그 임금은 인자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新羅其君仁而愛其民 신하는 충성된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고 其臣忠以事國 아랫 사람들은 윗 사람을 친부형과 같이 섬기고 있어 下之人事其上如父兄 비록 나라는 작지만 가히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雖小不可謀也라고 답한다. 이는 황산벌 싸움에서 필마단창 匹馬單槍으로 처들어 온 관창의 목을 베며 길게 탄식하는 階伯의 독백에서도 잘 들어난다. ‘신라는 참으로 기이한 용사도 많다, 소년조차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다 장성해서 기개에 차고 체질이 굳센 사람인들의경우에야‘ 階伯歎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이런 신라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지는 태종 무열왕때 백제와의 助川城(지금의 沃川)전투에서 목숨을 내던진 김흠운이 한 말에서도 역력하다. ‘사나이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거늘 남이 알아주든 주지 않든 오직 같을 뿐이다. 어찌 감히 구차스레이 명예를 구하리오‘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之一也 豈敢求名乎 이렇게 말한 김흠운은 신라의 진골이고 태종무열왕의 사위다. 그의 부하가 승세를 탄 적의 공격 앞에 이름도 제대로 냄이 없이 죽지말고 잠시 피할것을 권유했을 때의 김흠운이 쏟아낸 말이 유명한 기감구명호 豈敢救名乎 - 명예는 떳떳이 찾는 것이지 구차스레이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백제 · 고구려는 왜 망했을까 - 지도층 부패
이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지도층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심약했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그들은 이기적이었고 혜택만 받으려 했다. 그들은 기득권만 누리려 했고, 국민적 국가적 희생심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와해는 외부(외국 군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로부터 온 것이다.
茶山 丁若鏞이 쓴 百濟論을 보면 당시 백제 지도층이 어떠했나를 알 수 있다. 茶山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중 백제를 최강국으로 보았는데, 반대로 망하기는 제일 먼저 망했다고 기술했다.百濟於三國 最强而其亡最先. 그 이유를 茶山는 도성(당시 부여)이 외국군에게 점령을 당하는데도 국민은 그저 보고만 있고, 지방 각 郡의 군대는 머뭇거리며 진격할 생각을 전혀 않은데서 찾고 있다.四方觀望而不救 列郡逗留而不進. 지도층이 얼마나 부패했으면 국민 한 사람도 일어날 생각을 않고, 너희들 이제 당해보라는 듯 쳐다만 보고 있었겠는가. 각 郡의 군대는 왜 있는가. 국가가 위급할 때 그 국가를 위해 싸우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군대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누구 탓이겠는가.
고구려는 왜 망했을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사 교과서에 잘 쓰여 있듯, 고구려는 당시 세계 최고의 제국이던 수隨와 맞겨루던 대강국이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북으로는 송화松花 서로는 요하療河, 남으로는 한반도의 중부(아산․삼척)에 이르는 대국 중에도 대국이다. 면적으로 따지면 아마도 현재 한반도 전체의 2배 반 정도되는 50만㎢는 충분히 될 것이다. 어느 교과서도 면적과 인구를 적고 있지는 않지만, 그려놓은 지도를 보면 50만㎢도 오히려 작다할 것이다. 국민성도 대단히 호한豪悍한 것으로 三國史記에는 그려져 있다. 호방하고 기개있고 용감한 국민, 그 국민에게 감히 어떤 나라가 쉽게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왜 고구려는 그렇게 쉽게 망했을까. 대막리지大莫離支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2년이 안돼서 무너져버린다. 그것도 3국 중 가장 후진국이고 가장 약소국인 신라에게 망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을 따지기 전에 고구려는 정말 우리 역사에서 기술한대로 그렇게 강국이었을까. 수․당을 격파한 것을 보면 강국이었음엔 틀림없다. 그 강국이 왜 만주 대평원의 넓고 넓은 땅을 뒤로 한채 압록강 중턱의 국내성國內城에서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세 강을 건너 평양으로 내려왔을까.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나 이제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이다. 그 땅, 평야라는 면에서 보면 압록강 이남의 청천, 대동강변의 땅은 좋은 평야가 아니다. 만주 대평원에 비하면 그야말로 빈한하기 한량없는 땅이다.
고구려가 만일 그렇게 강한 나라였다면 국내성에서 협소한 산골 평야, 평양으로 내려오지 않고 만주 대평원의 중심지인 지금의 심양瀋陽으로 갔을 것이다. 거리도 국내성에서 평양이나 국내성에서 심양이나 별 차이가 없다. 더구나 당시의 중국대륙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였다. 오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를 거쳐 남북조南北朝 10개국으로 나누어 그들끼리의 치열한 쟁투로 외부로 눈 돌릴 겨를이 없던 때다. 반대로 고구려는 최전성기였다. 광개토대왕 재위 22년(391-413)과 장수왕 재위 78년(413-491), 총 100년의 전성기 중 평양으로 천도하던 장수왕 14년(427년)은 초기 3분의 1에 해당하는 전성기 중의 전성기다. 왜 이 전성기에 만주 대평원으로 나아가지 않고 보잘것없는 평양으로 들어 왔을까. 그 무엇으로도 해석이 안되는 이 ‘역사의 퇴행‘이 저쪽에서는 최분열기, 이쪽에서는 최전성기에 일어났다.
정말 고구려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 있는 것만큼 그렇게 강국이었을까. 그만큼 강국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수․당과 맞대결해서 승리한 것을 보면 신라 백제와는 비교가 안되는 강국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위에 乙支文德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고 淵蓋蘇文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대막리지였던 아버지 연개소문을 계승해서 장남 남생男生이 막리지가 되고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계승의 위기‘(succession crisis)도 없었다 할 수 있다. 형제간에 내분이 크게 일었지만, 그 정도로는 다른 나라 군대에 쉽게 짓밟히지 않는다. 더구나 唐의 중심지인 장안은 오늘날 시속 800~900㎞의 비행기로도 평양에서 4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에 있다. 고구려 또한 그들과 오랜 세월 끈기있게 겨루어 오던 역사적 경험과 전쟁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이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지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 상층이 자기 나라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내 권력 내 가문의 영화가 모두 국가 안위安危에 좌우된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내 나라의 역사가 끝나면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도 끝난다는 것을 연결해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내 밑에서 나의 명령대로 움직였던 저 국민들이 왜 그렇게 목숨을 내던지며 나라를 지키려했는지 그 의미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막리지인 장남 남생이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데리고 적국인 당으로 가서 자신에게 도전한 동생들을 죽이기 위해 거꾸로 자기 나라를 공벌하는 평양도행군 대총관平壤道行軍 大摠管이 되어 700년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폐허로 만들어 버린데서 잘 알 수 있다. 아무리 형제싸움이 치열했다 해도 자기가 태어나고 자기가 다스린 그 나라를 그렇게 무참히 공략할 수 있을까. 티끌보다 작은 의무감이 남았어도 그렇게 이적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金富軾이 삼국사기에서 ‘남생 헌성이 비록 당에서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본국의 처지에서 보면 반역자임을 면할 수 없다‘以本國言之未免爲叛人者矣고 한 것도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三國史記에서는 淵蓋蘇文이 비상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살해하는 등 바른 도리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고 잔악하고 방자하여 大逆을 하는데 이르렀다까지 말하고 있다. 蘇文非常人也而不能以直道奉國殘暴自肆以至大逆.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상실이 가져온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 ‘자기나라 사람이 반드시 자기 나라를 망친 연후에 남이 자기 나라를 망친다‘國必自伐以後 人伐之라고 한 것도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4. 가장 큰 가치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우리 지도층은 생생히 살아 있는 지도층‘이라 말 할 수 있는가. 지지도 높은 도덕적 지도층이라 자신할 수 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라면,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이 지도층의 재훈련과 교육이다. 그들의 정신적 재무장이며 지도층으로서의 정체성 재확립이다. 古都 慶州의 가장 큰 가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눈에 보이는 문화재들이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의 마음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던 이 노블레스 오블리지라 할 수 있다. 이 정신은 三國史記 신라인들의 列傳 전편全篇 어디든 차듯 넘치고 있다. ‘우리는 충절과 신의로써 나라를 부지한다. 하지만 백제는 오만에 차서 멸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에 차서 위태롭다. 우리는 그들의 그 굽음을 우리의 그 곧음으로 친다. 어찌 뜻을 이루지 못하랴. 今我國以忠信而存 百濟以傲慢而亡 高句麗以驕滿以殆 今若以我之直擊彼之曲 可以得志이다.
현대적 용어로 바꾼다면, 신라 지도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지로 부지하고 나라를 경영하는데 백제와 고구려는 그런 정신은 이미 오래 전에 고사되고 지도층 자체가 너무 부패해서 완전히 몰락했다는 의미다. 충성스럽고도 희생적이며 공고히 단합된 도덕적 지도층 -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고 지지받는 그 생생히 살아있는 지도층과 그 지도층의 리더십, 그것이 바로 오늘에 되살려야 할 古都 慶州의 가장 큰 가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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